Executive Summary
AI 거버넌스 센터(GovAI)와 헤르티 스쿨 연구진이 12개국의 정부 서비스를 훑어, AI 에이전트 때문에 요청이 몰린 사례를 11개 관할에서 84건 추려 냈습니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에이전틱 플러딩(agentic flooding)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경고하는 글이 아니라, 이미 접수된 서류를 세어 본 기록입니다.
정작 오래 남는 대목은 대응 쪽입니다. 정부가 마찰을 더해 막은 사례가 14건 있는데, 수수료 재도입이나 IP 차단처럼 오늘 당장 깔 수 있는 조치들입니다. 논문은 이 조치가 가난하고 디지털 문해력이 낮은 이용자부터 비대칭적으로 걸러 낸다고 적었습니다. 창구를 넓히려던 기술 때문에 창구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표본 안에 있습니다. 민사 전자소송의 지급명령 신청이 사례 하나로 올라와 있고, 법률 문해력이 낮은 사람도 소송을 낼 수 있게 됐다는 맥락에서 인용됐습니다.
주요 수치
출처: Schmitz 외, arXiv:2608.16603 (2026-08-17)
2,288 → 84
후보 서비스 중 기준을 통과한 사례
비용 감소 경로, 수요 변화 증거, AI 귀속 진술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남았습니다
87%
단일 메커니즘이 차지한 비중
언어모델이 텍스트를 싸게 대량 생성한 경우이며, 자율 브라우저 탐색 같은 정교한 행동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4,000쪽
독일 사회법원에 접수된 서한 한 통
건수가 아니라 한 건의 분량이 늘어난 사례이며, 접수 제한으로는 걸러지지 않습니다
14건
마찰을 더해 대응한 사례
84건의 17%이며 수수료 재도입, IP 차단, 대리 접수 제한이 여기 들어갑니다
2,288개를 훑어 남은 84건
연구진이 처음 늘어놓은 후보는 12개국 정부 서비스 2,288개였습니다. 나라마다 190개쯤을 본 셈인데, 여기서 세 조건을 모두 통과한 것만 남겼습니다. AI가 그 서비스의 이용 비용을 낮출 만한 경로가 그럴듯하게 설명되고, 수요 패턴이 실제로 달라진 증거가 있고, 정부나 신뢰할 만한 제3자가 그 변화를 AI 탓으로 명시적으로 지목한 경우입니다. 스무 개 중 한 개도 남지 않아 84건이 됐습니다.
훑은 나라는 열두 곳입니다. 호주, 브라질, 덴마크, 에스토니아, 프랑스, 독일, 일본, 네덜란드, 싱가포르, 한국, 영국, 미국이 목록에 있었고, 이 가운데 열한 곳에서만 기준을 통과한 사례가 나왔습니다. 한 나라는 빈손이었다는 뜻입니다. 사례 수집은 언어모델의 도움을 받은 정성 코딩으로 했습니다. 후보를 넓게 긁는 단계와 기준을 조여 가는 단계, 최종 확정 단계를 나눠 두고 매 단계마다 사람이 다시 확인했습니다.
근거의 무게도 따져 볼 만합니다. 84건 가운데 58건은 정부 관계자가 직접 AI를 지목했고, 나머지 26건은 언론이나 법률 전문지 같은 제3자만 그렇게 말했습니다. 도메인별로는 사법·법률 서비스가 19건으로 가장 많았고 규제 민원 10건, 복지·사회보장 9건이 뒤를 이었습니다. 공공서비스와 사법서비스가 전체의 73%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공청회 의견 접수나 정보공개 청구처럼 서비스라기보다 참여 채널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이 그림 자체가 처음 나온 것은 아닙니다. 행정학에는 수요가 처리 역량을 앞질러 창구가 막히는 상태를 가리키는 혼잡한 관료제라는 개념이 이미 있었고, 미국 연방법원에서는 변호사 없이 스스로 소송을 진행하는 사건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관찰이 앞서 나와 있었습니다. 84건이 한 일은 그 이론에 숫자와 관할 이름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논문은 여기서 한 발 물러섭니다. 84건이 인과를 증명하지도, 전체 행정 서비스를 대표하지도 않는다고 저자들이 못 박아 두었습니다. AI가 민원 증가분의 몇 퍼센트를 만들었는지 말할 수 있는 데이터는 아직 없습니다. 이 표본은 이런 일이 이 정도 규모로 이미 벌어졌다는 존재 증명입니다.
건수만 늘어난 게 아니다
연구진이 정의한 에이전틱 플러딩은 AI 에이전트와의 상호작용 때문에 정부 서비스로 들어오는 요청의 양이나 복잡도가 급증해, 처리 역량에 실질적인 부담을 주는 상태입니다. 조건이 하나 더 붙습니다. 그 급증의 원인이 에이전트가 상호작용 비용을 낮춘 데 있어야 합니다. 그냥 민원이 늘어난 것과 AI가 민원을 늘린 것을 갈라 두려는 장치입니다.
급증은 두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건수 자체가 늘어난 양적 플러딩이 50건, 한 건의 분량과 복잡도가 늘어난 질적 플러딩이 76건이었고, 둘이 겹친 사례가 42건입니다. 독일 사회법원에서는 4,000쪽이 넘는 서한이 접수됐습니다. 이 구분이 실무에서 중요한 이유는 대응책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하루 접수 건수를 제한하는 흔한 조치는 질적 플러딩에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한 건만 내도, 그 한 건이 4,000쪽이면 부담은 그대로입니다.
관측된 메커니즘의 87%는 한 가지로 모입니다. 언어모델이 텍스트를 싸게 대량 생성한 경우입니다. 에이전트가 관공서 사이트를 스스로 돌아다니며 절차를 밟는 장면은 아직 표본에 없습니다. 저자들은 이를 두 가지로 읽습니다. 하나는 텍스트 생성이 가장 성숙하고 쓰기 쉬운 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로 들어온 제출물에서만 유독 이상 징후가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정형 양식으로 들어온 신청은 사람이 냈는지 에이전트가 냈는지 구분하기 어려워, 이미 벌어지고 있어도 표본에 잡히지 않습니다.
돈이 되고 복잡했던 창구부터 뚫린다
논문은 서비스별 위험을 13개 요인으로 나눠 재는 매트릭스를 제시합니다. 그 표에서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조건 두 개가 겹칠 때입니다. 신청이 성공했을 때 돈이 되고, 그동안 절차의 복잡성이나 전문지식 요구가 수요를 억눌러 온 서비스가 가장 먼저 흔들립니다. 세무 신고, 사회법원 소송, 부동산가치 이의신청, 소액소송이 여기 해당합니다.
매트릭스가 재는 축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플러딩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에이전트 능력이 얼마나 무르익었고 그 능력을 쓰는 값이 얼마나 싼지, 접수 창구가 얼마나 허술하고 제출에 품이 얼마나 드는지, 성공했을 때 얼마가 손에 들어오는지를 봅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터졌을 때의 심각도인데, 한 건을 처리하는 데 드는 노력과 지금 이미 얼마나 꽉 차 있는지, 예산과 인력을 늘릴 여지가 있는지, 법으로 못 박힌 처리 기한이 있는지를 따집니다. 열세 개 요인 가운데 대부분은 AI와 무관하게 각 기관이 이미 알고 있는 값입니다. 그래서 이 표는 AI가 앞으로 얼마나 빨리 발전할지 몰라도 오늘 채울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복잡함이 그동안 방어벽 노릇을 해 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설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그랬습니다. 논문은 행정 부담을 세 갈래로 나눕니다. 규정을 이해하는 학습비용, 서식을 채우고 서류를 모으는 순응비용, 관료 조직을 반복해 상대하는 심리비용입니다. 요약과 문맥 결합, 메모리를 갖춘 에이전트는 셋을 동시에 깎아 냅니다. 여기에 상업적 유인도 붙습니다. 항공 지연 보상이나 정형화된 대량 청구를 대리하고 수수료를 떼는 업체들이 이미 AI를 광고 문구에 넣고 있습니다.
논문이 표로 정리한 사례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은 민사 전자소송의 지급명령 신청으로 이름이 올라 있고, 유형은 질적 플러딩입니다. 접수 건수보다 한 건이 요구하는 검토 부담이 늘어난 쪽입니다.
| 관할 | 서비스 | 유형 |
|---|---|---|
| 호주 | 연방 정보공개 청구 | 양적 |
| 독일 | 사회법원 소송 | 양적 + 질적 |
| 영국 | 온라인 소액소송 | 양적 + 질적 |
| 일본 | 전략에너지계획 공공의견 | 양적 + 질적 |
| 네덜란드 | 지자체 부동산가치 이의신청 | 양적 + 질적 |
| 대한민국 | 민사 전자소송 지급명령 | 질적 |
| 브라질 | 임시장애급여 신청 | 질적 |
브라질 사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AI로 만든 가짜 진단서로 임시장애급여를 타 내려는 시도가 섞여 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권리가 있는 사람이 권리를 행사한 경우입니다. 논문이 굳이 이 구분을 남긴 이유는, 부정 신청을 잡아내는 도구로는 선의의 급증을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빨리 깔 수 있는 대응이 가장 위험하다
84건 가운데 56%에서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움직였습니다. 다만 상당수는 구속력 없는 안내문 발표에 그쳤습니다. 실제로 요청을 줄이는 조치를 택한 것은 14건이고, 방식은 마찰을 더하는 쪽이었습니다. 호주는 정보공개 청구에 수수료를 되살렸고, 일본은 공공의견 접수에서 특정 IP를 차단했으며, 네덜란드는 이의신청을 대리하는 업체가 수수료를 떼 가는 관행을 막았습니다.
마찰이 먼저 선택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결제 시스템이 이미 깔려 있으면 수수료는 오늘 올릴 수 있고, 법 개정이 필요하더라도 손대는 범위가 좁습니다. 반면 처리 역량을 늘리는 쪽은 예산 편성과 조직 개편, 때로는 입법을 거쳐야 합니다.
요청을 줄이는 방법은 하나 더 있습니다. 신청이 성공했을 때 받는 것 자체를 줄이는 길입니다. 급여를 깎거나 자격 요건을 좁히면 굳이 신청할 이유도 줄어듭니다. 다만 이쪽은 행정부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입법을 거쳐야 해서, 급할 때 꺼내 드는 카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문제는 마찰이 누구를 먼저 막느냐입니다. 수수료와 인증 절차는 요청을 낸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걸러지는 쪽은 돈이 없고 디지털 문해력이 낮고 처음부터 도움이 절실했던 이용자입니다. 논문은 이를 절차적 불평등과 사법 접근권 훼손, 정부 신뢰 저하로 이어지는 경로로 봅니다. 복잡한 서식을 대신 써 주는 도구는 원래 이 사람들의 벽을 낮추려던 것이었습니다.
마찰이 오래 버티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CAPTCHA가 그랬듯 에이전트 능력이 올라가면 마찰 자체가 무력해지고, 남는 것은 사람에게만 걸린 문턱입니다. 복지 서비스처럼 수수료 부과가 법으로 금지된 영역도 적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이런 임시방편을 행정학에서 말하는 그럭저럭 버티기와 연결해 읽습니다.
마찰 없는 길은 왜 아직 안 깔렸나
접근성을 해치지 않는 쪽도 이미 시작되긴 했습니다. 서비스 자체를 다시 설계한 사례가 13건, 처리 과정에 에이전트를 붙인 사례가 21건입니다. 영국은 지역계획 협의에 들어온 의견을 감성분석으로 묶어 읽었고, 브라질은 AI로 만든 가짜 진단서를 잡아내는 탐지를 강화했으며, 한국 법원은 사건번호의 진위를 확인해 주는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다만 대부분은 한 단계만 처리하는 제한적인 도구입니다. 구조적 개편은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고, 그동안 예산과 인력은 제한된 수요를 전제로 짜여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의 순서가 문제가 됩니다. 역량을 늘리는 선택은 급증이 시작된 뒤에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위기가 오기 전에 시작해 둔 조직만 쓸 수 있는 카드입니다.
논문이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꼽은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 • 노출도 감사. 리스크 매트릭스로 자기 서비스 포트폴리오를 지금 순위 매길 수 있습니다. AI가 얼마나 빨리 발전할지 예측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조치입니다.
- • 디지털 신원 전략. 전자 인증이 있으면 청구인당 요청 제한을 자동으로 걸 수 있고, 기존 데이터를 미리 채워 정상 이용자의 부담도 함께 줄입니다. 이미 100개 넘는 관할이 인프라를 갖췄지만 성숙도 차이가 큽니다.
- • 법적 불확실성 해소. 제출 채널 제한이나 수수료 인상이 합법인지가 관할마다 불분명합니다. 미리 법률 검토를 끝내 두는 것 자체가 위기 때의 대응 속도를 정합니다.
결론에서 저자들이 잡은 톤은 파국이 아닙니다. 행정이 급성으로 무너질 가능성은 낮게 보되, 예산 조정과 이용자 경험 저하는 적어도 일부 사례에서 피하기 어렵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마찰 대응이 굳어지면 AI가 약속했던 접근성 향상은 거기서 막힙니다. 반대로 지금 필요한 준비는 디지털 정부 연구자들이 오래전부터 요구해 온 개혁과 방향이 같습니다.
데이터를 다루는 쪽에서 이 논문이 남기는 질문은 행정 바깥에도 적용됩니다. 어떤 창구든 유입 비용이 갑자기 0에 가까워지면, 그 창구를 지켜 온 것이 정책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번거로움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번거로움이었다면 대체할 장치를 만들어야 하고, 그 장치가 문턱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 그다음 과제입니다.
Editor's Note: 페블러스가 데이터 파이프라인에서 반복해 보는 장면도 비슷합니다. 유입량이 늘어난 뒤에 필터를 세우면, 걸러지는 것은 대개 나쁜 데이터가 아니라 형식이 낯선 데이터입니다. 검증을 상류에 두는 편이 늘 더 쌌습니다.
원 논문은 arXiv:2608.16603에서 볼 수 있습니다.